김좌진장군 생가지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은 1905년 홍성에서 호명학교를 설립하였고 1915년 광복 사건으로 3년간 옥살이를 했으며 청년학우회 회원, 한성일보 이사로 있다가 3. 1 운동 때 만주로 건너가 북로 군정서를 조직, 총사령이 되었다. 1920년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청산리 싸움에서 이범석 등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하고 1925년 김혁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930년 한족 총연합회를 조직, 주석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에 힘쓰던 중 공산청년당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광이 따로 있고 밖에는 마구간이 있다. 안채는 앞면 8칸·옆면 3칸의 기와집으로 서쪽을 향하고 있다. 왼쪽부터 2칸 부엌이 있고 아랫방과 윗방 각 한 칸씩 있으며, 통칸의 대청이 있다. 그 위에 방이 한 칸 있고 끝으로 툇마루가 있다. 방 앞으로 툇마루가 있는데, 맨 끝방 주위에는 툇마루를 한 칸 높여 누각처럼 만들었다. 마당 한쪽에 우물이 있으며 밖에 있는 마구간은 화장실과 마구를 3칸 집에 만들었다.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본채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매년 10월에는 백야 김좌진장군 추모제와 청산리전투 전승기념축제가 열리고 있다.
월요일은 휴무이니 참고해서 방문하기실 바랍니다.
김좌진 장군은 1889년 11월 24일(음력) 홍주목 고남면 행촌리(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3살 때 돌아가시고 편모슬하에 성장했으나 문인집안이자 홍성 갈산지역 부호로 어린 시절은 부유했다. 한해 거둬들이는 곡식이 3000석에 달하고, 마을 노복(奴僕)만 50여 호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게 한평생 배고픔 없이 살 수 있었던 김좌진 장군은 조국을 위해 안락보다는 고난의 길을 택했다. 억강부약(강한 것을 누르고 약한 것을 돕는다)을 마음에 새긴 그는 1905년 자신 소유의 노비 30여 명을 모아 놓고, 그들 앞에서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 이들에게 무상으로 논밭을 나눠 준 뒤 상경,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김좌진 장군 청산리 전투 배경 알아보자.
1919년 3.1운동 이후 우리나라 독립운동은 만주를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었다. 일본은 대한민국 독립군들을 찾아내기 위해 만주로 대규모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 독립군들은 소규모 단위로 구성되었고, 일본 순찰소 등 일본군 주요 시설을 공격하였다. 일본은 독립군 추격에 계속 실패하자 일반 평민을 체포하고 괴롭혔다. 당시 대한독립군을 이끌고 있던 홍범도 장군이 일본군을 독립군 본거지였던 봉오동(Bong_odong) 계곡으로 유인하여 섬멸하는 큰 승리를 얻었다.
'봉오동(Bong_odong) 전투 이후 일본은 간도 지방의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많은 군대를 투입했다.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부대는 일본군과 청산리에서 만났다. 김좌진 장군 부대는 일본군을 청산리의 골짜기로 유인하고 기습 작전을 감행하여 일본군을 섬멸하게 된다. 이로써 김좌진 장군 청산리 전투는 큰 승리를 거두게 된다.
104년 전 3월 1일 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신 순국선열들에게 잠시나마 감사의 마음을 가지며 홍성에 가신다면 이곳을 들러 우리나라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곳에 가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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